‘자연스러운’ 것의 경이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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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3-10-10
내용

조용한 경북 상주의 작은 마을에 연간 수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머물고 싶은 땅, 가장 농촌다워서 진정 ‘자연스러운’ 자연을 만나는 곳,
‘스테이지 파머스룸’의 이동우 대표를 만나 자연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봅니다.



머물고 싶은 땅, 농촌


스테이지 파머스룸(Farmers Room)의 아침은 고요하고 평화롭습니다. 단정하고 멋스러운 ‘삼백 갤러리’와 그 맞은편에 있는 잘 가꿔진 정원, 귀여운 동물들이 있는 ‘동물 상생 그라운드’에서 간간이 들려오는 염소와 양의 울음소리.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자연의 푸근함이 마음을 정화해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2016년부터 이곳에서 블루베리 농사를 짓던 이동우 대표는 2019년 청년 농부 5명과 함께 ‘머물고(Stay) 싶은 땅(地)’이라는 이름의 체험농장 ‘스테이지 파머스룸’을 창업했습니다. 비닐하우스로 체험장을 만들고 야심 차게 시작했지만, 문 연 지 15일 만에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문을 닫게 되었죠. 하지만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2020년 상주시청의 청년 농업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서 재개방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동우 대표를 비롯해 총 3명이 함께 재단장하고 문을 연 것은 지난 2021년 1월 1일, 방역 지침이 엄격하던 시기였습니다. 1월 방문자 수는 10명도 되지 않았는데, 2월에는 20명, 3월에는 80여 명. 그러더니 4월에는 200여 명이 되었어요. 그리고 지난해 대략 3,800여 명 정도가 스테이지 파머스룸을 찾았고, 올해도 벌써 2,000명이 넘는 체험객들이 방문했습니다. 사람들이 이곳을 그토록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무쓸모가 쓸모가 된 ‘자연스러운’ 공간


이동우 대표는 스테이지 파머스룸을 재단장하면서 사람들이 찾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공간 꾸밈에 고민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것이 ‘쓸모없는 것들의 쓸모’를 찾아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었죠. 시골에서는 도로 확장 공사를 하면서 잘려 방치된 감나무, 오래된 집을 새로 지으면서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고재나 기와를 버리는 일이 흔했어요. 그렇게 ‘버려진’ 것들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해 다듬어서 사용하고 자연스럽게 두었더니 일견 자연을 품은 공간이 됐습니다. 버려지고 방치된 것들의 쓸모를 찾아준 겁니다.

상주는 ‘삼백(三白)’이라고 해서 쌀, 곶감(흰색 가루가 생기는 것), 누에고치의 실을 뽑아 만드는 명주가 특산물이에요. 스테이지 파머스룸의 주요 공간인 ‘삼백 갤러리’는 이 같은 맥락에서 채워졌어요. 벽 한편에는 한때 쓸모를 다 했던 감나무가 다시 제 쓸모를 찾아 멋들어지게 세워져 있고, 나무 테이블 위에는 새하얀 명주 식탁보가, 그리고 천장에는 잘 마른 벼가 풍성하게 걸려 있습니다. 모두가 제 쓸모를 찾아 ‘자연스럽게’ 놓여 있죠.

버려진 것의 쓸모를 다시 찾아주는 일은 공간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스테이지 파머스룸에는 ‘동물 상생 그라운드’라는 공간에 말과 양, 토끼, 염소 등이 사이좋게 살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거나 개체 수 조절 등의 이유로 폐사 당할 위기에 처했던 동물들을 데려와 제 수명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갈 수 있도록 했죠. 그래서인지 동물들의 표정이 편안하고 행복해 보입니다. 사람들이 이곳을 계속 찾는 이유를 알 것만 같습니다. 농촌을 사람들이 떠나가는 곳이 아니라, 오래 머무르고 싶게 하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이동우 대표의 소망은 조금씩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연 속 다품종 농산물을 직접 체험하는 기회


스테이지 파머스룸에서는 계절별로 제철 농산물의 다양한 품종을 맛보고, 직접 수확해 간식을 만드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이동우 대표는 스테이지 파머스룸의 체험을 통해 우리 농산물의 ‘다양성’을 보여주길 원합니다.

농산물은 하나의 작물 당 품종이 100여 가지나 될 정도로 다양합니다.
‘블루베리’만 해도 신맛이 강한 종, 단맛이 강한 종 등 품종마다 맛이나 특색이 다르지요.
이렇게 소비자들에게 여러 품종을 경험하게 하고 자연 그대로를 전하고 싶었어요.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 바로 ‘테이스팅’ 프로그램입니다. 농산물을 직접 맛보면서 자신의 취향에 맞는 품종을 발견하고, 여러 가지 요리를 해보는 것이죠. 계절별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은 다양해요. 12월부터 5월까지는 딸기, 6월, 7월은 블루베리, 8월, 9월은 텃밭 작물, 10월, 11월은 고구마와 샤인 머스캣입니다. 계절별로 이렇게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있는 것은 작물을 재배하는 마을 주민들과 연계하기 때문입니다.



만남과 대화의 시작, 치유의 공간으로
이동우 대표는 체험농장에서 더 나아가,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접점을 늘리기 위해 카페 개관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농부 시장’ 마르쉐에서 만난 한 소비자가 ‘이것과 저것은 왜 맛이 달라요?’하고 질문했을 때, 농산물의 여러 품종과 사람들의 취향을 이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생각의 전환이 생기고 스테이지 파머스룸이 방향성을 찾게 된 것이죠.

또한 사람들과의 만남과 대화 속에서 치유의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스테이지 파머스룸은 경북 상주 교육지원청과 협업하여 학폭 등 여러 가지 이유로 학업을 중단할 위기에 놓인 학생들의 학업 중단을 숙려하도록 돕습니다. 2017년에 초등학생이 친구들의 괴롭힘에 괴로워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그때 남긴 유서에 ‘어른들은 아이들을 무시하고, 자신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입으로만 선한 악마입니다.’라는 구절이 있었죠. 이동우 대표는 당시에는 이 사건을 제대로 접하지 못하다가 2019년에 알게 되었고, 그 문장이 내내 마음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저도 학창 시절에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경험이 있어요.
무척 괴로웠죠. 그 기억이 떠오르면서 어느새 어른이 되어버린 제 모습을 돌아보게 됐어요.
저 아이가 고통받고 있을 때, 나도 같은 어른은 아니었는지.
그래도 같은 경험을 했던 내가 도움을 줘야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이 됐어요.

스테이지 파머스룸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학생들은 농촌이라는 생소한 공간에서 천천히 닫혔던 마음을 열어갑니다. 몇 번씩 와도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아이가, 텃밭을 가꾸고 작물을 수확하는 체험 활동을 하면서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말문을 여는 모습을 보면 참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합니다.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는 시간


스테이지 파머스룸에 한 번 다녀간 방문객들은 두 번, 세 번 또 찾아옵니다. 계절별로 체험 프로그램이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연을 체험하며 사람과 동물들과 어울리며 더 큰 즐거움을 얻기 때문이죠. 자연에 과연 '무쓸모'라는 게 있을까요? 젊은 농부를 만나며 농업이 삶의 여러 곳에 스며들고, 낯선 자연과도 합일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철마다, 달마다 새로움을 내놓는 자연 속에서 함께 좋은 것을 생산하고 창조하고 나누는 시간이 쌓이다 보면 우리 안에 잠들었던 '자연스러움'이 되살아나지 않을까요? 그 '자연스러움'의 회복이 우리 삶을 더욱 건강하고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스테이지 파머스룸의 느릿하지만 묵직한 걸음에 따뜻한 응원을 보냅니다.



이한나 사진 박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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