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주 임영순 명인: 오직 사람만을 생각하며 빚은 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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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3-08-08
내용

집집마다 술을 빚어 마시는 가양주는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풍습입니다.
가양주는 지역이나 가문에 따라 지역 특산물이나 약재, 꽃 등을 넣어 맛과 향이 독특하지요. 
‘구기자’를 넣어 종가에서 10대째 구기주를 빚고 있는 임영순 명인의 ‘청양 둔송 구기주’를 소개합니다!






마시고 마셔도 속이 편한 구기주 


흔히 전통주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맛과 향은 곡물에서 우러나는 단맛과 누룩 특유의 구수한 향입니다. 새콤한 맛과 향은 특색이 강해 조화를 중시하는 우리 술의 정서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지요. 그런데 이런 관념을 깨는 특별한 술이 바로 구기주입니다. 구기주는 찹쌀과 멥쌀, 누룩을 기본 원료로 하고 여기에 구기자 열매와 뿌리, 두충껍질, 감초, 맥문동 등의 약재를 더해 빚는 약주입니다. 구기자 열매 자체는 신맛이 강하지만, 바싹 말린 후 뿌리와 함께 빻아 약재로 사용하면 기분 좋은 새콤함만 남아 술의 전체적인 맛과 향을 끌어 올려요.


임영순 명인은 충남 청양군 운곡면 광암리 하동 정씨 10대 종손 며느리입니다. 스물하나의 나이에 1년 열두 달 제사가 있는 종갓집으로 시집온 탓에 집안에는 언제나 술이 있어야 했고, 엄한 시어머니 밑에서 집안 대대로 내려오던 구기주 빚는 법을 배웠지요. 그리고 지금까지 67년의 세월 동안 구기주를 빚어오고 있습니다.


청양은 예로부터 구기자가 많이 나는 곳으로, 우리나라 전체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구기자의 최대 주산지입니다. 구기자를 쉽게 구할 수 있어 술을 빚을 때도 자연스럽게 구기자를 넣었으리라 짐작하겠지만 명인이 만든 구기주를 직접 마셔보면 술에 구기자를 넣는 이유를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지요.


시어머니랑 남편이 술을 하도 좋아해서 밤낮없이 구기주를 먹곤 했어요.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렇게 술을 마셔도 다음날 해장국 달라는 소리가 일절 없는 거예요. 
볼 때마다 참으로 신기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구기자 때문이더라고요. 
그전까지는 술에 색을 내려고 구기자를 넣는 줄 알았는데,
약효가 좋아서 넣는다는 걸 그때 알았지요.

이렇듯 비범한 효능을 가진 구기주는 조선 후기에 편찬된 『산림경제』, 『임원경제지』에서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오랜 역사를 지녔지만, 세상에 알려진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우리나라 대부분의 전통주와 마찬가지로 구기주 또한 집에서 빚어 만드는 가양주 형태로만 전해졌기 때문이지요. 그러다가 1996년에 이르러 임영순 명인이 대한민국식품명인으로 지정되며 널리 알려졌습니다.






아낌없는 재료로부터 우러나는 깊은 술맛


임영순 명인이 명인으로 지정된 지가 벌써 30년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남편을 떠나보내고 일찌감치 혼자가 된 명인은 당시 농촌지도소라고 불렸던, 현재 청양군 농업기술센터의 김미숙 농촌지도관의 도움을 받아 1996년 청양군의 첫 식품명인이 되었어요.


식품명인 인증 때문에 전국을 부단히도 돌아다녔어요.
명인 중에서도 국가 명인이라 절차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지요. 
술을 만들어서 심사위원에게 평가받는 것이 무척 떨리더라고요. 
그렇지만 집에서 전해오던 술을 좋게 봐주시고 식품명인의 자격을 주시니 어깨가 무거웠고,
전통을 지켜나가야겠다는 사명감도 들더라고요. 모든 분께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구기주를 찾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서 한때는 공장을 짓고 본격적인 상품화를 시도했지만, 명인의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었지요. 그래서 사업으로 생각하고 돈을 벌기보다는, 전통을 이어 나가는 것에 더 가치를 두자는 마음으로 지금은 가내 수공업 수준으로만 술을 빚고 있습니다. 술의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되는 구기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농산물도 명인이 직접 재배하지요. 좋은 재료를 아끼지 않고 듬뿍 넣는 탓에, 명인이 만든 진한 구기주를 처음 맛보고 감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며느리는 술맛이 너무 진하다고 재료를 빼려 하고, 그러면 나는 또 몰래 가서 다시 넣어요.
애초에 식품명인이 된 게 좋은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서 만든 술 덕분인데
이걸 아끼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과 다름이 없지요.
많이 마셔도 머리 안 아프고 속 편한 좋은 술을 만드는 게 돈을 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에요.

명인이 만든 구기주를 맛본 사람들은 그 깊은 맛을 잊지 못해 이따금 명인이 있는 청양을 찾아옵니다. 술을 빚어온 세월만 해도 반백 년이 넘다 보니, 부모님 손잡고 찾아오던 아이가 훌쩍 어른이 되어 명인을 찾는 일도 있지요. 술 빚는 일이 지겨울 법도 하건만, 잊지 않고 찾아주는 사람들이 있어 힘이 납니다.






한결같은 정직함으로 빚는 술


올해로 87세인 임영순 명인의 청양 둔송 구기주는 이제 며느리 최미옥 씨가 기능전수자가 되어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방문객을 대상으로 술 만들기 체험과 교육도 진행하곤 하는데 특히 설날과 추석 같은 명절에는 인기가 더 많아요.


아들과 며느리에게 늘 하는 이야기가 있어요.
무슨 일을 하든 간에 돈보다는 사람을 얻을 생각을 하라고요.
돈 때문에 사람을 버리면 나중에 적이 되고 원수가 돼요.
저는 돈은 못 벌었어도 이렇게 제가 만든 술을 좋아해 주고
멀리에서 배우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후회는 없어요.

사람들이 구기주를 기억하고 찾아오는 것이 좋은 일이지만, 요즘 사람들이 술을 소비하는 모습을 보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값비싼 가격의 와인이나 위스키를 찾는 사람들은 늘고 있지만, 전통주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전통을 지키기 위해 명인과 그의 며느리가 함께 이루어 나가는 일은 더 큰 가치가 있습니다.


명인의 손길이 닿는 소박한 텃밭에서 따사로운 햇살을 머금고 익어가는 구기자는 머지않아 붉은빛 자태를 뽐낼 것입니다. 한결같은 정직함으로 그윽이 빚어지는 구기주 한 잔에 오직 사람만 생각하는 명인의 따스한 마음이 넘실거립니다.







임명순 명인의 새콤달달한 구기주 빚기



1. 누룩 띄우기

통밀을 빻아 누룩을 띄우고 쌀로 고두밥을 찐 다음 누룩과 섞어 술독에 넣어요.


2. 재료 삶기

구기자 열매와 잎, 뿌리, 두충껍질, 맥문동, 감초 등의 재료를 10시간 정도 삶아요.


3. 발효시키기

삶은 약재를 술독에 붓고 섭씨 28℃에서 20일 정도 발효시켜요.


4. 숙성시키기

발효가 끝난 술을 용수로 걸러내어 다시 20일 정도 숙성시키면 구기주 완성!





차주익 사진 박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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