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안 사주면 폭락…'쌀값 함정'에 빠진 한국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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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2-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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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이 천덕꾸러기 신세다. 농민들은 쌀값 폭락에 신음하고, 정부는 농민들을 달래기 위한 쌀 시장격리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어야 할 처지다. 정부는 올 들어 최근까지 쌀 37만t을 사들인 데 이어 추가로 올해 안에 45만t을 매입해 총 82만t을 시장격리하기로 했다. 이는 작년 생산량(388만t)의 5분의 1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물량이다. 여기에 투입되는 예산이 어림잡아 1조80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전례를 보면 정부가 쌀을 사들이는 데 들어간 돈은 허공으로 날릴 가능성이 크다. 시장격리된 쌀은 정부 양곡창고에 최장 3년 정도 보관되는데, 막판에는 주정용이나 사료용으로 헐값에 처분된다. 이 경우 쌀 판매금액에서 그간의 보관료를 빼면 거의 제로에 가깝다. 사실상 쌀을 사들여 폐기 처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쌀 공급과잉은 올해만의 특이한 현상이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인 1998년부터 올해까지 25년간 두 차례를 제외하고 23년간 공급과잉이 발생했다. 이 정도면 쌀 공급과잉은 구조적으로 고착화된 현상이라고 봐야 한다. 더구나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쌀 소비 감소 속도는 더욱 빨라지고 있다. 공급과잉이 지금보다 더 자주, 더 크게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쌀의 수급 불균형 구조를 바로잡을 전략과 대책 마련에 국가적인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그런데 정치권은 지금 양곡관리법 개정안 문구 하나를 놓고 정쟁만 하고 있다.


현행 양곡관리법은 초과 생산된 쌀을 정부가 '사들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야당은 이를 '사들여야 한다'로 고친 개정안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 개정안은 다수당인 야당 주도로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를 통과해 상임위원회에 상정됐다. 법사위원회를 거쳐 본회의까지 통과된다면 앞으로 정부는 일정 기준 이상으로 초과 생산된 쌀을 무조건 사들여야 한다.


그렇게 되면 농민들은 더 이상 쌀값 걱정 없이 안정적으로 벼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겉보기에는 농민에게 도움이 되는 조항으로 보이지만 길게 보면 오히려 그 반대다. 단기적으로 쌀값 하락을 저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지만 지속가능한 방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장격리 의무 규정이 도입되면 농민들은 쌀 가격 안정 기대감에 벼농사를 더 많이 지으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면 쌀 공급과잉은 더 심화되고, 그에 따라 가격이 더 떨어지고, 이를 막기 위해 정부는 쌀 수매를 늘리려고 더 많은 예산을 투입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게 된다. 악순환이 무한루프처럼 반복될 경우 한정된 예산으로 쌀을 지속적으로 사들이는 건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어느 순간이 되면 정부도 손을 쓰지 못할 정도로 쌀 수급이 무너지면서 쌀 산업 자체가 붕괴될 수 있다.


구조적인 문제를 단기 미봉책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근본적인 대책을 세우려면 벼농사가 우리 농업·농촌·농민, 즉 삼농(三農)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정확히 짚어봐야 한다.


우선 2020년 통계를 기준으로 우리나라 전체 농가 중 벼농사를 짓는 비중은 52%에 달한다. 전체 경작 면적에서 벼농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46%다. 쌀 생산액은 8조4000억원으로 단일 품목 중 단연 1위다. 전체 농업소득에서 쌀이 차지하는 비중도 많이 줄긴 했지만 여전히 34%에 달한다. 쌀을 빼고 삼농을 이야기할 수 없는 수준이다.


농가 입장에서만 봐도 쌀만큼 확실한 농사가 없다. 정부가 시장격리를 통해 가격을 지지해주고, 경작 면적에 따라 직불금도 받는다. 벼농사는 기계화율이 99%에 육박하고 있어 사람이 직접 손을 쓸 일도 별로 없다. 농협경제연구소에 따르면 3000평 농사를 짓는 데 들어가는 노동투입 시간이 고추는 1448시간인 반면 쌀은 95시간으로 15분의 1에 불과하다.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는 농촌에서 쌀값이 떨어져도 벼농사를 쉽게 포기할 수 없는 이유다.


이럴 때 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안은 농가에서 쌀 대신 다른 작물을 재배하도록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일이다. 정부가 2018년에 도입한 쌀 생산조정제가 그 사례다. 기존 쌀 농가가 콩이나 조사료 등 다른 작물 재배로 전환하면 소득의 일정 부분을 보전해줬다. 2018~2020년 3년간 비교적 쌀 가격이 안정세를 보인 건 생산조정제 덕분이다. 실제로 그 3년간 쌀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지속적으로 감소해 2020년에 각각 72만6000㏊와 350만7000t까지 줄었다.


그러던 것이 예산당국의 비협조와 농정당국의 안일함으로 생산조정제가 폐지되자 작년 쌀 재배면적은 73만2000㏊로, 생산량은 388만2000t으로 다시 늘었다. 올해도 재배면적과 생산량이 작년보다 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의 쌀값 폭락 원인 중 하나로 정부의 정책 실패가 지목되고 있는 배경이다.


다행히도 정부는 다시 생산조정제와 비슷한 전략작물직불제를 내년부터 도입하기로 했다. 논에 벼 대신에 콩이나 밀 등 대체 작물을 재배할 경우 직불금을 지원하겠다는 복안이다. 생산조정제가 한시적인 제도였다면 직불제는 항시적인 제도라는 점에서 진일보한 정책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그러나 쌀 대신 다른 작물을 유도하는 인센티브 제도만으로 쌀의 구조적인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하기는 버겁다. 아무리 쌀 공급을 줄인다 해도 쌀 소비가 감소하는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민 1인당 쌀 소비량은 2000년 93.6㎏에서 작년 56.9㎏으로 21년 만에 39.2% 줄었다. 같은 기간 쌀 생산량이 529만1000t에서 388만2000t으로 26.6% 줄어든 것에 비해 감소폭이 훨씬 크다. 더구나 코로나19가 3년째 이어지면서 쌀 소비량 감소세는 갈수록 가팔라지고 있다. 당초 농업계에서는 올해 1인당 쌀 소비량이 전년 대비 2.1㎏ 줄어든 54.8㎏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최근 쌀 시장 거래동향을 감안할 때 51.9㎏까지 줄어들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나오고 있다. 쌀 소비 감소폭이 1년 만에 무려 5.0㎏에 달했다는 뜻이다.


이 같은 쌀 소비 감소는 코로나19 여파로 식당을 찾는 사람들이 줄면서 외식업계에서 소비되는 쌀의 양이 급감한 영향이 컸다. 여기에 혼인·출산율 하락에 따른 인구 감소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된다. 식습관 서구화로 인해 빵을 먹는 수요가 늘어난 데다 다이어트를 위한 '저탄고지(탄수화물을 적게 먹고 지방을 많이 먹는 것)' 식문화 확산도 큰 영향을 끼쳤다.


따라서 용케 벼농사 면적을 줄인다 해도 쌀에 대한 수요를 늘리지 않고는 고질적인 쌀 공급과잉 문제 해결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쌀 수요를 늘리기 위한 대책 마련에는 소홀했다. 시장과 소비자를 상대하느니 농민에게서 쌀을 사들이는 게 가장 쉬운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농민을 상대로 한 공급 조절 정책이 사실상 실패로 드러난 이상 이제는 수요 증대 정책 없이 쌀 공급과잉 문제를 해결하기는 어려워졌다.


쌀 수요를 늘리기 위한 최우선 과제는 쌀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는 일부터 시작돼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저탄고지' 식단이 유행하면서 쌀이 건강의 적으로 몰렸지만 이는 오해라는 게 영양학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비만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데는 저탄고지 식단이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건강한 일반인의 경우 고지방 식사를 지속하면 오히려 콜레스테롤 수치 상승으로 고지혈증 등 성인병이 생기는 단점이 크다. 쌀과 반찬으로 구성된 한식이야말로 영양학적으로 가장 균형 잡힌 식단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밥의 소비패턴 변화에 맞게 쌀 품종을 새로 개발할 필요도 있다. 시장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즉석밥을 비롯해 편의점 도시락, 삼각김밥 등에 딱 들어맞는 쌀 품종을 개발하는 게 그것이다. 일본 편의점에서 파는 도시락이 맛있는 건 밥 자체가 맛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선 밥이 식어도 맛이 좋은 도시락용 쌀 품종이 별도로 있을 정도다.


쌀 소비를 단번에 끌어올릴 수 있는 대안도 있다. 학교에서 아침 급식을 하는 방안이다. 쌀 소비도 늘리고 학생들의 영양도 챙기면서 가정에서의 아침식사 준비 부담도 줄일 수 있는 방안이지만 학교 급식은 농림축산식품부가 아니라 교육부 소관이다 보니 아이디어가 구체적인 논의로 진전되지 못하고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쌀 품질에서도 차별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쌀은 일부 지역산을 제외하고는 품질과 가격에서 별 차이 없이 판매되고 있다. 쌀에도 한우와 마찬가지로 등급제(특·상·보통)가 도입돼 있지만 거의 의미가 없다. 등급에 따른 품질 차이가 확실하지 않고, 높은 등급과 낮은 등급 간 가격 차이도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 보니 등급이 높을수록 밥맛이 좋다는 시장의 신뢰도 전혀 형성돼 있지 않다. 쌀에 등급제가 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일본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이 쌀 소비가 줄어들고는 있지만 그 속도는 매우 완만하다. 쌀 등급제가 철저히 시행되고 있고, 시장에서 등급제를 신뢰하는 데다 고품질의 쌀이 맛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소비자는 맛있는 쌀을 골라 먹으려고 하고, 쌀 생산자들은 그러한 소비자 기호에 맞추기 위해 쌀의 품질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좋은 쌀이 더 높은 가격을 받을 수 있는 시장이 형성돼 있는 것이 일본 쌀 시장의 최대 강점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고품질의 맛 좋은 쌀이 더 비싸게 팔릴 수 있도록 쌀 시장을 정상화해야 한다. 한우 농가들이 등급제를 기반으로 종자와 육질 개량을 통해 수입 개방의 파고를 훌륭하게 넘었듯이 이제 쌀 농가들이 그 뒤를 이어야 한다. 쇠고기에서 '투뿔' 등심처럼 '특품' 쌀이 프리미엄급으로 대접받는 시대가 와야 한다. 그러자면 쌀 농가들도 한우 농가들처럼 경쟁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고품질의 맛 좋은 쌀을 생산하는 농가가 그렇지 않은 농가보다 돈을 더 벌 수 있는 시장을 만들어야 한다는 뜻이다. 쌀 가격 하락을 국민 세금으로 막아주는 지금의 방식으로는 고품질의 쌀을 생산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무엇보다 이제는 쌀을 정치재가 아닌 경제재로 바라보는 시각이 자리 잡아야 한다. 쌀의 성역을 허물지 못하면 한국 농업은 아무리 발전해도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정치권과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국민 세금으로 농민에게 선심을 쓰는 게 아니라 경쟁에서 이탈하는 농민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쌀의 함정에서 벗어날 때 한국 농업에 새 길이 열릴 것이다.


매일경제 정혁훈 농업전문기자

* 기사, 썸네일이미지 출처: https://www.mk.co.kr/opinion/columnists/view/2022/10/876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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