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일트럭 콘셉트로 티셔츠 팔자 “재밌다” 줄서… ‘팬덤소비’ 시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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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22-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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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6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골목길에 20여 명이 줄을 늘어섰다. 전통시장에서나 볼 수 있는 과일트럭 콘셉트로 티셔츠를 파는 ‘김씨네 과일’이다. 손님들은 이들이 여기서 장사한다는 인스타그램 공지를 접하고 모여들었다.


판매 상품은 사과, 포도, 딸기 등이 프린트된 평범한 티셔츠. 하지만 판매 방식이 독특했다. 다마스 차량 앞에 시장 과일 좌판처럼 늘어놓은 빨간 소쿠리에 과일 프린트가 나오게끔 티셔츠를 개서 담았다. 제품 설명도 누런 골판지에 검은 매직으로 대충 썼다. 판매자들은 시장 상인처럼 옷을 ‘검은 봉다리’에 담아 건넸다. 장명환 씨(29)는 “판매 일정을 직전에 알려선지 한정판을 사는 느낌”이라고 했다. 권지수 씨(28)도 “힙하고 즐겁다”고 말했다. 한 장에 3만 원, 2장에 5만 원인 티셔츠는 이날도 한 시간 만에 수십 장이 팔려 나갔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후 소비에서 가성비나 효용성보다 즐거움과 재미를 추구하는 소비자가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제품을 온라인으로 미리 검색하고 구매하는 ‘타깃소비’를 넘어 이색 경험에 꽂혀야 지갑을 여는 ‘팬덤소비’ 시대가 왔다는 분석이 나온다.


○ 충동구매 저물고 꽂혀야 사는 팬덤소비로
31일 동아일보와 바이브컴퍼니는 코로나19 유행 기간인 2020년 1월부터 올해 6월까지 블로그,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에 게시된 110억 건의 문서를 텍스트 마이닝(text mining·비정형 텍스트 데이터에서 유용한 정보를 찾아내는 기술) 기법으로 분석했다. 그 결과 소비 관련 상위 30개 키워드 중 70%가 ‘신나다’ ‘즐기다’ ‘행복하다’ ‘신기하다’ ‘즐겁다’ 등 감정적 충족감을 표현한 서술어인 것으로 나타났다. ‘싸다’ ‘아깝다’ 등 가격(16%) 관련 서술어나 ‘추천하다’ ‘빠르다’ 등 구매 행위(13%) 관련 서술어에 비해 압도적으로 비중이 높았다.


이런 경향은 젊은 세대에서 두드러졌다. 10대는 ‘재밌다’, 20∼30대는 ‘합리적’, 30∼40대는 ‘신나다’가 주요 키워드로 꼽혔다. 60대 이상의 ‘경솔하다’ ‘충동적이다’ ‘정신없다’ 등의 키워드와 대비된다.


이는 젊은 소비자들이 물건 자체보다 물건을 구매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경험을 중시하게 됐음을 뜻한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요즘 소비자들은 온라인에서 화제가 된 것을 어디서 판매하는지 찾아 품을 들여 구매하는 일련의 과정을 중시한다”며 “물품 자체 가치보다 그것까지 가는 과정의 경험이 보물찾기처럼 값진 것”이라고 말했다.


그 대신 과거처럼 무작정 오프라인을 돌아다니며 눈에 띄면 구매하는 충동구매 방식은 현저히 줄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온라인에서는 무엇을 살지 미리 정하고 들어오는 타깃 구매가 대부분이라 과거와 같은 시식 홍보, 사은품 증정 같은 마케팅이 더 이상 잘 통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일단 ‘재밌다’는 입소문이 나면 평범한 제품에도 사람들이 저절로 몰린다. 김씨네 과일 김도영 대표는 “옷 사기 자체가 즐거운 경험이 되다 보니 직접 눈으로 보고 사진도 찍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공유하는 고객이 많다”고 말했다. 이들은 현대백화점, 이마트24, 배스킨라빈스 등 굴지의 유통 대기업도 줄줄이 구애해와 협업 중이다.


○ 색다른 경험 쫓아 불편함도 기꺼이 감수
기존 소비 관행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소비 행태도 빈번해졌다. 서울 서대문구에 사는 직장인 이모 씨(25)는 집 앞 가까운 편의점을 놔두고 특정 편의점에서만 파는 이색 컬래버레이션 상품을 찾아 굳이 먼 곳까지 간다. 이색 신제품을 소개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팔로잉해놓고 ‘신상’(신상품)을 계속 확인한다. 이 씨는 “지난달 나온 연세우유크림빵을 구하려고 출근길 동선에 있는 편의점들을 일일이 들르면서 재고를 확인했다”며 “크림빵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그런 경험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친구들과 공유하는 게 재밌다”고 말했다.


경남 통영의 인기 카페 울라봉의 대표 제품은 라테아트로 욕을 써주는 ‘쌍욕라떼’. 돈 주고 기다렸다가 욕을 먹는 셈인데도 주말이면 300명씩 몰려 한 시간 넘게 기다려야 한다. 사장 안지영 씨(42)는 “최근 SNS나 커뮤니티 등에 돌며 더 많은 사람에게 알려진 것 같다”고 말했다.


게릴라식 판매 방식과 소비도 일반화되고 있다. 이동식 서점 ‘북다마스’는 다마스에 독립출판물 240여 권을 싣고 제주도 곳곳을 다니며 책을 판다. 판매 장소는 팔로어 1만 명이 넘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그때그때 공지한다. 판매 방식이 화제가 되며 다양한 카페와 손잡고 해당 카페 앞에서 작은 서점을 연다. 제주 제주시 조천읍의 한 카페 사장인 박민규 씨는 “북다마스가 오면 손님들이 최고 50%까지 더 몰린다”며 “색다른 경험을 원하는 손님들의 수요를 충족시켜서인 것 같다”고 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기성세대는 자신의 성향과 선호가 정해져 있는 데 비해 젊은 세대는 유연하고 사회 변동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편”이라며 “특히 MZ세대의 소비 행태는 각자의 개성을 존중하는 ‘소비자 민주주의’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다”고 했다.


“조던 신발 등 한정판 굿즈 포기못해”… 콜라보 상품도 인기

젊은소비자, ‘가격’보다 ‘재미’에 민감
기업들, 이해하기 힘든 소비현상에
MZ세대 조직 꾸려 프로젝트 기획


대학원생 이동령 씨(26)는 1년에 5∼6번씩 아디다스 이지(Yeezy), 나이키 조던(Jordan) 등 한정판 신발을 구매한다. 대학원생이다 보니 경제적인 부담은 있지만 2015년부터 이어온 취미를 포기할 순 없어서다. 일주일에 두세 번씩 온라인 사이트에 가서 재고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건 오랜 습관이 됐다. 그는 “한정판 신발은 가치가 오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신발을 좋아해서 하는 일”이라고 했다.


이 씨처럼 소비에서 즐거움과 의미를 찾는 소비자가 늘면서 젊은층의 소비 트렌드에 발맞춰 한정판 굿즈, 이색 마케팅 등에 공들이는 소비재 기업이 늘고 있다. 기업들은 젊은층 소비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로 ‘재미’와 ‘트렌드’를 꼽았다.


동아일보가 최근 국내 주요 소비재·유통기업 44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MZ소비자들이 가장 민감해하는 영역은 무엇인가’(복수 응답)라는 질문에 재미(95.6%)가 1순위로 꼽혔다. 트렌드·디자인(90.9%)이 2순위로 뒤를 이었다. 반면 가격·가성비(43.2%)는 상대적으로 낮은 응답률을 보였다.

직장인 이모 씨(24)는 올해 초부터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일주일에 한 번씩은 이전에 유행했던 스타일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뉴트로 패션’의 옷을 사 모으고 있다. 이 씨가 사 모으는 옷들은 대부분 최근 다시 유행하고 있는 청바지나 컬러풀한 면바지로 부츠컷이나 배기바지다. 그는 “주변에선 ‘왜 이런 걸 입냐’고 하지만 내가 좋아하기도 하고, 요새 다시 유행이 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게 됐다”고 했다.


기업들도 재미를 강조한 제품을 쏟아내고 있다. 롯데마트는 지난달 초 국내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의 등장인물이 극중 맛있게 먹던 바나나, 크림빵, 만두, 자장면 등의 음식에서 영감을 얻어 총 20여 개의 컬래버레이션 상품을 선보였다.


하이트진로는 ‘진로=두꺼비’라는 공식을 만들어내면서 굿즈를 통한 부활을 알렸다. 튀어나온 배와 ‘짧뚱한’ 팔다리,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외모에 엉뚱함과 귀여움을 무기로 한 두꺼비 캐릭터가 인기의 요인이 됐다. 전국을 돌면서 두꺼비 굿즈를 판매하는 ‘어른이(어른+어린이) 문방구’ 콘셉트의 두껍상회를 열기도 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기존의 소비 문법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소비 현상이 이어지다 보니 대학생 자문단이나 MZ세대 조직을 꾸려 실제 프로젝트 기획에 연결하고 있다”고 했다.


동아일보 오승준, 윤다빈 기자

* 기사, 썸네일이미지 출처: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0901/1152466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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